
AI 여덟 명으로 리서치센터를 차렸습니다
안녕하세요 남도공입니다. 지난 글에서 매일 밤 제 컴퓨터가 주식 숙제를 한다고 소개했는데, 오늘은 그 속을 하나 열어봅니다.
시작은 단순한 의문이었습니다. AI한테 종목 하나를 골라서 “이거 어때?” 하고 물어보면, 거의 항상 그럴듯하게 좋다고 합니다. 신사업이 어떻고, 차트가 바닥을 다졌고, 기관이 관심을 보이고 — 근거까지 완벽해요. 문제는 어떤 종목을 넣어도 비슷하게 완벽하다는 겁니다.
생각해보면 당연합니다. AI는 질문을 받으면 그 질문에 맞는 근거를 성실하게 찾아주는 성격이라서, “이 종목 어때?“라는 질문 자체에 이미 “좋은 점을 말해줘”가 반쯤 들어 있는 거예요. 이걸 데리고 투자 판단을 시키면 안 되겠다 싶었습니다.
미리 써둡니다 — 이 글은 투자 조언이 아닙니다. 아래 나오는 종목 이야기는 전부 시스템이 남긴 기록의 소개이지, 사라거나 사지 말라는 얘기가 아니에요.
증권사 흉내를 내보기로 했습니다
진짜 증권사 리서치센터는 애널리스트 한 명이 다 하지 않습니다. 재무 보는 사람, 차트 보는 사람이 다르고, 회의에서 서로 반박하고, 결정은 위에서 합니다. 이걸 통째로 흉내 내기로 했어요. 마침 비슷한 생각을 한 논문도 있길래 구조를 참고했습니다.
그래서 지금 제 시스템에는 AI가 여덟 명 있습니다. 애널리스트 넷, 토론 담당 둘, 팀장, 그리고 집행 담당. 종목 하나가 들어오면 이 팀이 차례로 심의합니다.
종목 하나가 통과하는 심의 라인. 애널리스트 4 → 토론 → 팀장 판정 → 집행안 순서로 흐르고, 아래는 네 명이 낸 소견 점수입니다.
장치 하나 — 서로 다른 서류만 줍니다
핵심은 넷을 갈라놓는 것입니다. 재무 담당한테는 실적과 재무제표만 주고, 차트는 안 보여줍니다. 차트 담당한테는 가격과 거래량만 주고, 뉴스는 안 보여줘요. 뉴스 담당, 시장(업종·지수) 담당도 마찬가지입니다.
왜 이렇게까지 하냐면 — 한 명이 다 보면 첫인상을 정해놓고 나머지 근거를 첫인상에 맞춰 고르기 때문입니다. 사람이 하는 실수랑 똑같아요. 차트가 예뻐 보이면 뉴스도 좋게 읽힙니다. 서류를 갈라놓으면 적어도 “차트가 예뻐서 재무도 좋아 보이는” 오염은 막을 수 있습니다.
재무 담당의 보고서. 오른쪽에 이 담당이 짚은 리스크가 따로 남습니다. 이 담당은 이 종목의 차트가 어떻게 생겼는지 모릅니다.
장치 둘 — 싸움을 붙입니다
넷의 보고서가 모이면 토론입니다. 한 명은 무조건 사자는 편, 한 명은 무조건 말리는 편을 맡습니다. 성향이 그런 게 아니라 직업이 그렇습니다. 강세 담당은 사야 할 이유를, 약세 담당은 사면 안 되는 이유를 넷의 보고서에서 찾아와야 하고, 두 라운드에 걸쳐 상대 논지를 정면으로 반박해야 합니다.
이걸 넣은 이유도 앞의 문제랑 같습니다. 그냥 두면 AI들은 서로 동의하는 쪽으로 흘러요. 반대할 사람을 직업으로 박아놔야 불리한 얘기가 테이블에 올라옵니다.
같은 보고서 네 장을 읽고 정반대 결론을 변호하는 두 연구원. 라운드가 갈수록 서로의 논지를 콕 집어 반박합니다.
그리고 팀장이 결정합니다
토론까지 다 읽은 팀장 AI가 셋 중 하나로 판정합니다. 사자(GO), 기다리자(WAIT), 거른다(VETO). 사자가 나오면 그제서야 집행 담당이 얼마나 살지를 짭니다.
월가가 “강력매수”로 올린 종목을, 이 팀은 걸렀습니다
얼마 전에 미국 주식 쪽으로 시스템을 넓히면서 실험을 하나 붙였습니다. 월가 애널리스트들이 강력매수로 상향한 종목만 골라서 이 팀에 넣어보는 거예요. 진짜 전문가와 제 AI 팀의 의견이 갈리는지 보고 싶었거든요.
결제 앱 만드는 블록(Block)이라는 회사가 있습니다. 월가 전문가들의 84%가 매수 의견이고, 막 상향 리포트도 나온 종목이었어요. 저 혼자였으면 “전문가들이 사라는데” 하고 넘어갔을 상황입니다.
그런데 팀의 판정은 WAIT, 기다리자였습니다.
팀장의 판정문. 결론 한 줄이 먼저 오고, 번호 달린 근거가 따라옵니다.
회사가 장사를 잘하고 있다는 건 아무도 부정하지 않았습니다. 재무 담당은 “최근 두 분기 연속으로 실제 이익이 전문가 예상보다 16~24% 더 많이 나왔다“고 했습니다. 그런데 약세 담당이 이런 지적을 했어요 — 그렇게 좋은 소식이 나왔는데도 주가가 오히려 빠졌다고. 좋은 뉴스에 안 오르는 주식이라는 거죠. 팀장은 이 지적을 받아서 “회사는 좋다, 하지만 지금 가격 흐름에서 살 이유는 없다, 기다려라”로 정리했습니다.
“좋은 회사”와 “지금 살 주식”을 분리한 건데, 이게 AI 하나에 물었으면 절대 안 나왔을 결론입니다. 하나였으면 두 분기 연속 어닝 서프라이즈에서 이미 결론이 났을 거예요.
전문가들과의 맞대결은 계속 쌓고 있습니다
이 실험은 일회성이 아니라 상설로 돌아갑니다. 월가 강력매수 상향 종목이 나올 때마다 팀에 넣고, 판정과 그 뒤 수익률을 계속 기록해요.
월가가 올린 종목들과 그에 대한 팀 판정의 추적표. 수익률처럼 보이는 숫자는 월가가 보는 상승 여력이고, 실제 채점은 시간이 해줍니다.
솔직히 말하면 아직 표본이 적어서 “우리 팀이 월가보다 낫다”라고 할 수 있는 단계가 전혀 아닙니다. 월가가 맞고 우리 팀이 겁쟁이였던 걸로 판명날 수도 있어요. 지금 규칙은 이렇습니다 — 판정 열 건이 채점될 때까지 소액으로만 굴리고, 성적이 형편없으면 이 리서치센터는 통째로 접는다. 시스템의 다른 부품이 그랬듯이, 이것도 성적으로 살아남아야 합니다.
삽질 하나 — 보고서를 못 알아듣겠어서
처음 이 팀을 돌렸을 때 보고서가 이런 식이었습니다. “리비전 사이클 내 눌림”, “수급 공백 구간”. 만든 놈이 못 알아듣는 보고서가 나오더라고요. 잘 쓴 보고서가 아니라 못 쓴 보고서였습니다. 읽는 사람이 못 알아들으면요.
그래서 팀 전원에게 규칙을 하나 박았습니다. 주식 전공 안 한 사람의 언어로 쓸 것. 지금은 재무 보고서에 “앞으로 1년 벌 이익 기준으로 보면 주가가 이익의 15배 수준이라 비싸지 않다” 같은 문장이 옵니다. 같은 내용인데 이제 제가 읽고 고개를 끄덕일 수 있어요. AI한테 일을 시켜보니, 출력의 똑똑함보다 내가 알아듣는 것이 훨씬 귀하다는 걸 배웠습니다.
비용 얘기
이 심의는 종목 하나에 AI 호출이 여덟 번 들어가고 2~3분 걸립니다. 비싸 보이지만 AI 코딩 도구 구독에 얹혀 돌아가서 추가 비용은 0원이에요. 사람 리서치센터를 월 구독료로 고용한 셈이라, 이 시스템에서 가성비로는 제일입니다.
정직하게, 한계
약점도 있습니다. 여덟 명이라고 부르지만 사실 전부 같은 AI입니다. 서로 다른 사람 여덟이 아니라, 같은 사람한테 서로 다른 서류를 주고 여덟 번 물어본 것에 가까워요. 그래서 진짜 독립적인 의견 여섯 개는 아닙니다. 그래도 서류를 갈라놓고 반대 직업을 박아놓는 것만으로 “다 좋다고 하는 병”은 눈에 띄게 줄었고, 월가 상향 종목을 거르는 판정까지 나오는 걸 보면 흉내값은 하는 것 같습니다.
다음 편은 아침 7시 40분에 하루 딱 한 번만 결정하는 이유 — 그리고 “오늘은 아무것도 안 산다”는 판정이 백만 원 넘게 아껴준 날 이야기입니다.
(다시 한번 — 이 시리즈는 투자 조언이 아니라 만든 과정의 기록입니다.)